Secure La Società Senza Dolore: Perché Abbiamo Bandito La Sofferenza Dalle Nostre Vite Edited By Byung-Chul Han Displayed In Manuscript
afrontamos el dolor dice mucho de como estamos organizados en sociedad, Esta es la hipótesis que explora el filósofo coreano ByungChul Han en su último libro La sociedad paliativa.
Defiende que el mundo contemporáneo proscribe la experiencia del dolor y por eso nos invita a hacer un recorrido que va de la pérdida de sentido del dolor y de su despolitización a la psicología positiva que nos anima a rechazar aquello que es negativo de la vida.
A su vez, nos muestra como estos dolores solo reaparecen de forma desorganizada en las depresiones, los dolores crónicos sin causa aparente o en nuestra hipersensibilidad delante de las situaciones engorrosas y en los extremismos que intentan recuperar violentamente el sentimiento de si.
El diagnóstico no nos deja indiferentes: la vida indolora que promueve nuestra sociedad paliativa elimina toda la capacidad de transformación que tiene la negatividad.
La fantasia transhumanista que nos promete liberarnos de los sufrimientos de la carne y el espíritu y hasta liberar la inmortalidad no es tan inocente como suena.
Sin dolor, defiende Han, empatizar con el dolor de los otros nos es imposible, pero por encima de todo, el precio a pagar de eliminar la muerte de la vida es la vida humana misma.
" Miquel À. Riera La società senza dolore di Han è una commistione di cose già note: un po' di Agamben, un po' di Foucault, un po' di Lévinas apportando, a parer mio, ben poche novità.
Han prende in considerazione il tema del dolore, tentando di analizzarlo secondo varie declinazioni che saranno poi i vari capitoli.
La tesi che il filosofo sostiene è, sostanzialmente, che il dolore sia una sorta di motore dell'uomo: La vita priva di dolore e munita di costante felicità non sarà più una vita umana.
Tutto vero, questo è innegabile, ma di certo nulla di nuovo,
Segnalo però il capitolo Ontologia del dolore, particolarmente interessante e fecondo di riflessioni, Qui l'autore, partendo da Heidegger e Jünger, tenta, appunto, di affrontare, a livello ontologico il tema che si sviluppa in tutto il libro.
Il capitolo è breve come gli altri del resto pertanto non esaustivo come gli altri, del resto,
Conoscendo già Han, sono rimasto abbastanza deluso da questo breve saggio, Mi aspettavo riflessioni molto più approfondite, Mi pare, invece, che questo libro sia stato scritto velocemente, cavalcando l'onda della pandemia in atto, essendo questo un argomento che tratta in più occasioni.
In conclusione: ne consiglio la lettura a chi è a digiuno di argomenti quali filosofia contemporanea, biopolitica e compagnia cantante questo potrebbe essere un buon modo per sviluppare una curiosità verso queste tematiche.
La società senza dolore è infatti un saggio molto agevole, dove è semplice seguire il pensiero dell'autore, A onor del vero penso sia giusto riconoscere ad Han la capacità di esprimersi in maniera molto efficace e diretta caratteristica già riscontrata in altre sue opere.
고통 수용 사회로 반증하는 고통 없는 사회
고통에 대한 담론은 세월의 흔적을 안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은 고통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색하고, 의학적으로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 의료 기술을 개발하고, 신경학적으로 고통에 대한 뇌의 신경 반응을 탐색하여 일상생활의 스트레스 요인과 고통의 반응 간 상관관계를 밝히고자 하였다.세기에도 예외 없이 이러 논의는 이어지고 있으며,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어느 때보다 사람들은 고통에 대한 해결사로 인터넷을 탐색하고 있다. lt고통 없는 사회gt는 고통에 대한 논의에 연장선상에 놓인 책이다.년, 코로나 팬데믹의 생생한 현장을 안고 출판되어 전세계의 이목을 받았으며, 국내외 언론으로의 다양한 찬사는 아직도 뜨겁게 이어지는 고통에 대한 인류의 탐색을 그 자체로 논증하고 있다.
고통 없는 사회
고통을 회피하는 것은세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제러미 벤담이 공리주의의 도덕원리, 쾌락은 선이고 고통은 악이다를 내세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론을 지지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고통을 회피하려 하고, 이는 아퀴나스의 자연적 경향성 중 자기보존의 원리로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 없는 사회'에서는 과거 다른 시대보다도 더욱이 지금 이 시점에 현대인은 고통에 무감각해져 있음을 지적하고 있으며, 그 이유로 긍정성의 폭력성을 들고 있다.
행복의 긍정성이 고통의 부정성을 밀어낸다. 행복은 긍정적인 감정 자본으로서 성과 능력이 약화되지 않고 계속 발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기 동기부여와 자기 최적화는 신자유주의적 행복장치가 매우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해주는데, 큰 비용을 전혀 치르지 않고도 지배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쪽
고통을 정당화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갖은 수단으로써 고통을 긍정적 기제로 받아들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억압,착취하는 사회구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며, 제기하더라도 적극적, 능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참여 의사를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소시민적 태도를 보이며 사회 문제에 대해 한탄을 늘어놓는 것에서 그친다. 이런 순응성에 담긴 행위자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경제 관념에 내재된 한계점을 살펴보아야 한다. 자본주의 경제 질서는 사람들의 능동적 수용을 낳았기 때문에 혁명으로써 극복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자본주의와 대치되는 이념, 사회주의 운동의 실패로 확인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일어나기 바랬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사회주의는 매혹적인 이론으로 수많은 지식인들의 손을 거쳐 갔지만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가 낳는 복종성 때문에 포기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순응성은 비단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매체에서도 드러났으며, 일례로 팬데믹 시기, 강력한 반응을 일으켰던 문학 작품 'Normal People'Sally Rooney에서는 소외된

부유계층을 “풍자”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 불평등함을 공감할 수 있는 불편함으로 승화하고, 독자가 그들을 이해함으로써 계층화 현상에 대한 능동적 “수용”을 촉구하고 있다. 즉, 인간의 공감능력이라는 자연적 경향성에 의거해 더 은밀하고 의심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대중이 계층 간 불평등을 수용하게 하여, 또 다른 불평등에 대한 경제적 소외계층마르크스 언어로는 "피지배집단"의 수동성을 야기하는 지배계층의 불평등한 권력 구조의 생산 수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는 저자가 표현하듯,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분야는 “자본주의“라는 생산 체계를 긍정하는 신호를 보내며, 현대인들이 성과사회의 독촉과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 고통을 개인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으로 보는 사회적 시각은 고통에 대한 암묵적인 사회적 동의를 암시함으로써 현대인들이 고통을 비판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즉,세기 현대사회에서 고통은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자주 노출되어 성과사회의 구속력과 압박감에 상반되는 아름다움이라는 미적 가치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여장을 통해 아낸 저자 한병철의 핵심 요지는 일관되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부문에서 고통을 억압하고, 무한한 긍정성을 간판 삼아 무의식적으로 고통에 대한 수용을 촉구함으로써 사물의 본질을 명료하게 만들어주는 고통을 망각하게 만든다는 것. 그러나 책의 제목은 저자가 비판하고자 하는 바로 그 점을 은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순점을 안고 있다. 없다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사실이나 현상이 현실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 또는 어떤 일이나 현상이나 증상 따위가 생겨 나타나지 않은 상태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고통의 부재가 아니라, 실재하는 고통에 대한 내성을 생산하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한글판 제목은 수정돼야 할 것 같다. 고통 없는 사회가 아닌, 고통 수용 사회로.
고통 없는 사회에 대한 반문
'고통 없는 사회'에서는 정치, 자본주의, 바이러스 팬데믹에 대한 흥미로운 논의를 담아내고 있다,
정치에서도 고통스러운 토론은 사라진다. 논쟁하고 더 나은 논거를 찾기 위해 싸우는 대신, 막연한 중도의 진통지대에서 몸을 사린다.
정치에서 있어 저자는 현대인들이 다른 사람과 부딪히는 것을 피하고자 막연한 중도를 택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실제로 권위 있는 미국 통계기관 pew research center에 따르면 중도는 보수 다음으로 가장 많은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정치학파이다. 그러나 가장 현실적으로 한국의 지난 대선 결과만 보더라도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정치파가 양극단으로 극명하게 나뉘어 있고, 이는 비단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볼 수 있다. 트럼프 이후의 비판과 편 나누기의 시대에서 잦은 정치 싸움을 벌이고,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익명성이라는 가면에 숨어 외집단을 공격하고 있는 우리가 과연 고통을 피하고 있냐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또한 본성적으로 자신의 굳은 가치관과 신념을 고치지 않으려는 인간이, 굳어지고 퇴색한 가치관에 투영된 세상만을 바라보고 확증편향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에 부합하는 근거만을 발견하는 현상으로 자신의 주관성을 강화하는 인간이, 단순히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중도를 선택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반문해 볼 만하다.
격리 사회가 생겨나며, 생명정치적 감시 체제가 수립된다. 팬데믹은 어떤 다른 삶의 형태를 낳지 않는다. 바이러스와의 전쟁 속에서 삶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생존이 된다. 생존의 히스테리는 바이러스를 통해 첨예화된다. 쪽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많은 것들이 생존을 위해 보류된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인 부활절 예배조차 중단되고, 신학은 바이러스학에 현실에 대한 해석주권을 넘겨준다. 이웃 사랑은 이웃에 대한 거리두기의 모습을 취한다. 쪽
코로나 바이러스의 도래 이후 우리는 안전과 인류의 생존, 두 가지 가치를 최우선 가치로 삼았다. 확진자의 동선을 파악하기 위해 개인정보를 스스럼없이 내놓았으며,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비생명적, 그러나 주체적이고 사적인 요소들을 국가에 저당 잡히면서까지 삶을 보존하고자 했다. 에나 지금이나 인류는 생존을 최우선 목적으로 삼아 왔지만, 코로나 팬데믹의 차별성은 처음으로 과학 기술의 한계를 시험하는 모종의 실험이었다는 점. 결론적으로 인류는 조금씩 삶을 회복해 나가고 있고, 이전과는 분명 다른, 개인화된 삶의 양식으로 돌아서고 있다.
저자는 바로 이 점, 개인화되고 분절된 삶의 양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이를 자유주의 종말로 표현한다. 코로나 팬데믹 속 생명 감시 기술들은, 스스로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인간의 자연적 경향성에 부합함으로써 올더스 헉슬리가 우려했던 '멋진 신세게'에 대한 “대중의 자발적 수용”을 예정보다 빨리 앞당겨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타 논의와 같이 이러한 개인의 수용성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으며, 과거에 비해 인터넷이 발달하였기 떄문에 통제할 수 없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일상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으로, 그렇게 고통에 대해 인류가 대안을 찾아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한편에서는 이러한 논의도 던져 볼 수 있다. 과연 고통을 회피하고 생존을 갈구하는 인간의 경향성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인식해야 할까 과거의 인류는 성공을 위한 쉬운 길을 갈구했지만, 현실의 한계에 부딪혀 뼈저리는 노력 내지는 약간의 운에 기대어 스스로의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러나차 정보화 혁명 인터넷의 시대에는 굳이 고통스러운 길을 택하지 않더라도 그럭저럭 살 수 있는 대안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에 대한 대안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게 된 것이고, 이는 생존을 위한 인류의 오랜 고투에 마침표를 찍는 시대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즉, 고통을 회피할 수 있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인간의 능동적 고투가 낳은 긍정적인 인과적 결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고통 수용 사회에 대한 고찰
모든 것을 종합하여 고통 수용 사회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수 있냐고 묻는다면, 분명 그건 아니다, 우리 자신의 고통을 수용함으로써 우리는 개인의 문제를 사회의 문제로 인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어느 때보다 정신건강, 사회 내 차별 문제, 인종차별 문제, 성차별 문제, 난민 문제, 환경 문제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 운동이 벌어지고 있으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차츰 수용적 태도로 사회가 변하고 있다. 상당수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적인 도움을 받아, 천천히 저마다의 느린 방식으로 고통을 정면 돌파해 나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고통 수용 사회를 단순히 고통을 회피하는 차원에서만 해석할 수 없으며, 사회 운동의 성격이 다양화되고 분화되며 집합적이고 단결된 단 하나의 혁명보다는 각 사회의 부문에 상이한 극복 노력이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책 '고통 없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고통 사회의 긍정적인 작용에 대한 논의는 크게 다루지 않고 단순히 고통을 회피하는 차원에서만 논의가 전개되고 있어, 사회적으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할 수 있는 기제가 마련된 긍정적인 현 상황을 간과하고 있다.
물론 저자의 말처럼 고통에 무감각해지면 안 될 것이다. 현대인들은 자극적인 미디어 탓에 그 어느 때보다 폭력성과 고통에 많이 노출되어 있고, 이 때문에 고통에 대한 내성이 생기고 있다. 고통이 지각되지 않는 고통으로 느껴진다면 앞서 얘기한 고통에 대한 대안을 “선택”할 수 있는 능동성은 소멸하게 된다. 따라서 고통에 대해 민감성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이 있듯, 고통에도 분명 반대 면이 있다. 고통은 아름다움을 실재하게 하지만, 저자의 논조처럼 고통이 주는 긍정적인 면에만 지나치게 매몰되어 고통으로의 역행을 주장하는 것은 안 될 노릇이다. 따라서 '고통 없는 사회'는, 고통을 견디도록 선천적으로 설계된 존재가 아닌 인간에게, 현대사회가 그 고통을 개인이 감내하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양으로 번역하여, 사회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문제를 주체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중요한 논의를 남긴다. .